마산 창동 길을 지나다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의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창원 봉곡동에서 같은 상호의 미용실을 본 기억이 있었다. 가게를 옮긴 걸까 싶었지만, 알아보니 창원을 기반으로 몇몇 군데 가맹점을 둔 미용실이란다. 최근에는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용실도 많기에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머리 한구석에 접어두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프랜차이즈가 많은 것은 아니다. 특히나 미용업으로 한정한다면 정말 몇 안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는 곧바로 미용실에 연락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그렇게 미용 연구가 임진택(55) 씨를 만나게 됐다.

 


미용 연구가 임진택 씨.


 

금남의 영역이었던 '미용'

 

'이상무 커트라인' 미용실 매장에서 인터뷰할 것이라는 처음 예상과 달리, 인터뷰 약속 장소는 '이상무 명품가발'이라는 가발 매장이었다. 얼마 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가게 경영·관리·홍보 등의 보조적 역할을 하고, 지금은 가발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창원에서 미용실을 하는 이유요? 제가 창원 사람이니까요. 고향이 창원 북면이에요. 8남매 중 7번째죠. 지금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임 씨는 1976년 중학교 졸업 후 곧장 미용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에야 남성 미용사들이 많이 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용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큰 꿈을 안고 (미용을)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저 빨리 돈 벌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알아봤죠. 시골에서 명절 때가 되면 차려입고 정종 같은 술 한 병씩 들고 귀향하는 동네 형들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그래서 진학은 생각도 안 하고 빨리 월급 받고 싶다는 생각에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네요."

빨리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은 이해가 되지만 그게 미용업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묻자 동네 이발소 사장님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단다.

"제가 어릴 때부터 머리 만지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제 딴에 멋 부린다고 이리저리 가르마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고 다니니까 동네 이발소 사장님이 미용사나 해보라고 하더군요. '여자만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남자 미용사도 있다고, TV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뭣도 모르고 마산 미용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저 혼자더라고요. 이게 뭔가 싶었더니, 남자는 서울에서나 몇 명 있고 이 동네에선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경남도 1호 남자 미용사가 됐습니다."

임 씨가 청일점으로 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일은 쉬이 풀리진 않았다.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그를 받아주는 미용실은 없었다. 혹시 싶어 여러 미용실을 다니며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장난하냐'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남자인 임 씨에게 당시 미용업의 벽은 너무 높았다.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니까 어쩔 수 없이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상대로 머리를 해줬습니다. 미용실에서 파마약 같은 걸 직접 사 와서 해드리곤 했었죠. 그러다 서울로 가면 남자라도 미용사를 할 수 있다기에 옷가지 몇 개 챙기고 무작정 서울로 갔습니다."

 

 

험난했던 수행의 과정

 

임 씨는 서울로 가서도 일이 순탄치는 않았다고 한다. 지역보다는 덜하지만 서울에서도 남자 미용사는 드문 존재였다. 서울 미용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받아주는 미용실을 찾았다.

"서울 미용실에서 일하긴 했는데, 그걸 제대로 일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월급이 없었거든요.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보니 먹고 자는 것도 미용실 소파에서 했죠. 결국에는 비전이 없다는 생각에 창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자리 못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부산에 가면 남자 미용사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부산 미용실 이곳저곳에 문의해보고 남포동에서 받아주는 곳이 있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원장님이 남자였어요. 이때가 18살, 1976년이었습니다."

어렵사리 미용사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기회가 왔다. 경험을 쌓으면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를 서면의 미용실에서 스카우트했다. 남자가 머리를 해 준다는 게 신기해선지, 일부러 남자 미용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았던 것이다.

"제가 딱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저를 찾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마 '남자 미용사'라는 희소성 덕분이었던 거 같아요. 1982년 정도 됐을까요, 부산에서 작은 남자 미용사 모임 같은 것도 생기면서 서로 교류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는 남자 미용사는 '정말 드물지만 못 쓰는 사람은 아니다' 정도의 인식이 생긴 거 같아요."





다시 창원으로

 

그는 부산에서 경험을 쌓은 뒤 마산으로 돌아왔다. 경험도 쌓았고 서울이나 부산 등의 대도시에서 남자 미용사들의 활약도 있었기에 처음보다는 수월히 일자리를 구했다. 그때도 마산에서 유일한 남자 미용사였다고 한다.

"일자리를 구하긴 했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월급이 한 달 밥값도 안 되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미용사들이 밥 먹을 때 공기밥 같은 거만 추가해서 맨밥만 먹고는 했죠."

그에게 변화가 온 것은 27살 때다. 양덕동의 미용실 직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사장이 '니가 가게를 맡아봐라'고 한 것이다.

"온전히 제 가게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매장을 도맡아 운영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29살 때 산호동 골목에서 제 명의로 된 미용실을 오픈했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산호동 자유수출지역이 대단했거든요. 얼마 안 가 도로변의 조금 넓은 곳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나중에는 창동으로 가게를 옮겼죠. 대부분의 가게가 비슷하겠지만, 미용실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시내에서 가게를 해야 한다는 게 있었거든요."

창동에 가게를 낸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오픈 후 5일 동안 무료로 머리를 해 주거나 사은품으로 드라이기를 주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한 덕분에 찾는 이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당장에 돈을 많이 남기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단골손님을 확보하자고 생각했어요. 한 번 찾았다가 안 오면 소용이 없잖아요? 오픈 후 며칠간은 정말 쉴 틈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용실 가격이란 게 주먹구구식이었어요. 찾는 손님마다 가격을 다르게 했거든요. 좀 친한 사람에겐 싸게,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또 비싼 파마를 하는 분께는 비싼 약을, 싼 거 하는 분에게는 싼 약을. 이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격을 통일했습니다. 파마나 염색도 가격에 따라 약을 바꾸는 게 아니라 손님의 머리 상태를 보고 정하도록 했어요. 비싼 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 머리에 적합한 약이 있거든요."

 

 

이상 無, 이상무 커트라인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갑작스러운 궁금증이 생겼다. 그의 이름은 '임진택'이다. 하지만 상호는 '이상무 커트라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일까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상무라는 게 사람 이름이 아니에요. 낯부끄러운 소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커트도 잘하고 파마도 잘하고,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상 무(無)', 이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를 쓰게 된 거죠."

그렇게 지역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은 후 이상무 커트라인의 첫 가맹점이 생긴 건 2005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체인점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밑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경험을 쌓아 하나둘씩 분가하면서 자기 가게를 차리게 됐는데, 그때 직원 중 몇 명이 이상무 커트라인이라는 상호를 쓰고 싶다고 한 것이다.

"저 스스로가 체인사업을 할 만큼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같이 일하던 직원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다고 하니까 준 거죠. 직원이 아니면서 상호를 쓴 분은 딱 한 분 있었네요."

지금에야 미용실을 비롯해 각종 프랜차이즈 사업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이가자, 박승철 등 지금도 유명한 전국 프랜차이즈 미용실 서너 군데를 제외하면 마산에서는 최초의 프랜차이즈 미용실이었다고 한다.

"매장이 많이 있을 때는 15개 정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6개 매장만 있습니다. 상호는 다르지만 제가 도와주는 곳이 두어 곳 있고요. 프랜차이즈라곤 하지만 가맹비를 받거나 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이상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으니 홍보를 하거나 할 때는 다 같이 돈을 거둬서 쓰는 정도죠. 그리고 원장님들이 초보도 아니에요. 각 원장님마다의 색채가 있으니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도 없죠. 처음에야 재료라던지 경영 이런 것 대부분을 도와줬지만,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뒤에는 물어오는 것에 조언만 해주고 있습니다.



미용 연구가 임진택 씨.

 

 

"더는 할 수 없을 때까지 가위 들고파"

 

그는 2년 전, 2014년을 마지막으로 미용실 일선에서 물러났다. 직접 운영 중이던 창동 미용실도 맡아서 하고 싶다는 직원 2명에게 넘겼다. 지금은 미용실의 경영에 대한 조언자 역할을 하는 정도다. 그리고 지금 주력하고 있는 게 가발 사업이다.

"새로 시작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예전부터 미용실 안에서 가발이나 마사지, 신부화장 이런 걸 다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전문 매장으로 나온 게 얼마 안 된 거죠. 가발 전문 매장을 운영한 건 10여 년 정도 됐네요.

가발사업이라곤 하지만 이 역시도 그가 하던 미용업의 일부다. 혹시 미용업 외의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뭐 다른 걸 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40여 년간 이 길을 걸어오면서 곁다리로 여러 일을 하기도 했어요. 미용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고, 폐업한 미용실의 중고 기자재들을 사고파는 일, 또 미용 연구나 기술 심사위원, 지역 방송의 미용 협찬, 그리고 지금 하는 가발 사업 등. 결국 '미용'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진 않았죠. 앞으로도 쭉 이쪽 일만 할 생각입니다."

일선에서 물러나 가위를 잡는 일이 적어졌다. 지금의 소회에 대해서도 물었다.

"지금도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에요. 다만 나이가 있다 보니 어려움이 따르더라고요. 절 찾으시는 손님도 저에게 맡기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고. 능력을 떠나 손님을 100%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미용실 일선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일 자체는 계속할 거예요. 나중에 걷지 못하거나 손이 떨려 가위를 못 잡게 되는 정도가 아니면, 저를 찾는 분이 마지막 한 명만 남더라도 일할 겁니다."

 

40여 년의 기간. 기자가 살아온 삶의 시간보다도 훨씬 긴 시간이다. 긴 세월 동안 미용이라는 한우물만 판 임진택 씨. 아직도 식지 않은 그의 열정에 감탄하며, 그의 앞으로의 행보도 지켜보고 싶다.


- 피플파워 2016년 7월호

Posted by 개척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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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간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12시가 다 돼간다. 점심 메뉴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선배가 정하는 대로 가는 게 마음이 편하건만, 내 편의를 봐주시며 뭘 먹을지 결정하란다. 부랴부랴 맛집을 검색해봤지만 끝도 없다. 어디 잘 정리해놓은 곳이 없을까 찾다가 어플리케이션 '넝쿨'을 알게 됐다. 넝쿨에는 배달음식점 추천이나 지역의 맛집, 편의시설 등에 대한 소개가 정리돼 있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넝쿨에 들어갔다.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넝쿨. 넝쿨을 만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길은 꼭 알아야 가는 게 아니다

 

-우선 대표님의 개인정보를 파악해두려 합니다. 나이나 가족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1977년 11월 6일, 경북 김천 출신입니다. 동생이 한 명 있고요. 결혼해서 8살이 된 딸과 5살인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아내는 디자이너로 함께 일하고 있어요."

 

-위미르 창업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군에서 장교생활을 했습니다. 과학화전투훈련(KCTC)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서 훈련 소프트웨어 기획을 맡았습니다. 7년간이요. 전역하고 나서는 마케팅회사에 몸담았었습니다."

 

-IT기업을 운영하시고 있습니다. 원래 IT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나요?

"IT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어요. 스마트폰 붐이 일어났을 때에서야 조금 다루는 정도였고요."

 

-처음부터 창업하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요?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니 여건이 안 돼서 못했죠. 그러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택시 기사님이랑 한 얘기 덕분에 창업을 결심했어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손님이 네비게이션도 안 되는, 모르는 길로 가자고 하면 기사님은 어떻게 하시는지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당연히 가야지. 길은 꼭 알아야 가는 게 아니다'고 하시더군요. 모르는 길도 가다 보면 알게 된다고, 모른다고 가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배울 기회가 없어지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것저것 재면서 창업을 망설이던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결심했죠. 일단 창업을 하자고. 그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아이템 하나 없이 창업부터

 

-아이템에 대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창업을 하신 건가요?

"네. 기획도 없고 아이템도 없었어요. 그냥 일단 창업부터 하고 아이템을 생각했죠. 2012년 겨울부터 준비했고 2013년 11월 14일에 창업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5월까지는 아이템도 없이 지냈어요."

 

-아이템이 없었다고요?

"모여서 '뭐 하면 좋을까?' 이런 회의나 하고···. 수익이 제로였습니다. 그러다가 부동산 정보를 제공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보려고 했고요."

 

-넝쿨이 아니라 부동산 서비스인가요?

"제가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뭐가 필요한지, 뭐가 가능성이 있을지 많이 고심했어요. 그러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 방을 구하는 게 힘들다는 생각에 부동산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생각했죠."

 

-그 서비스는 잘 됐나요?

"기획단계에서 접었습니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이런 서비스는 교차로가 잘하고 있더라고요. 사업의 가능성도 가능성이지만, 스스로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이템으로 삼아 사업의 기회로 삼자는 생각을 하면서 지역에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고민했어요. 그때 떠올린 게 넝쿨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스토리'입니다. 

 

-동네스토리···. 넝쿨의 원래 이름인가요?

"아직 확정되기 전 단계에서 쓰던 이름이죠. 제가 생각한 이름인데, 동네에 있는 정보를 다루자는 생각에 지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전부 반대해서 '넝쿨'이 되었습니다. (웃음)"

 

-넝쿨을 기획하면서 구상했던 건 어떤 게 있나요?

"1년 정도 아이템을 고민해 보니 생활정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네이버 같은 종합포털은 파워블로거 등, 광고비를 통한 광고로 가득 찬 상태였고요.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앱들은 지역의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특히 수수료가 있거나 광고비가 터무니없이 높았고요. 그래서 광고비가 낮으면서 좋은 서비스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달앱 시장은 이미 큰 업체들이 선점하고 있는데요. 우려는 없으셨나요?

"물론 걱정했죠. 하지만 지역 상인들을 직접 만나보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존 배달앱은 수수료나 광고료가 비싸서 상인들에게 부담이 컸어요. 상인들에게 부담이 안 되는 수준의 금액으로 사업을 하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배달 서비스 외에 다양한 카테고리의 서비스를 제공해서 차별화를 두기도 했고요."

 

넝쿨 소개. /위미르



 

배달앱이 아닌 지역의 정보통

 

-넝쿨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려주시죠.

"넝쿨을 두고 배달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조금 다릅니다. 창원 지역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자는 생각으로 만든 게 넝쿨이거든요. 맛집이나 의류점, 공연시설, 병원 등. 지역에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9개의 카테고리로 나눠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현재 등록된 업체는 몇 곳인가요?

"8000여 곳 정도 됩니다. 그중 유료로 등록된 곳은 800개 정도고요. 무료 등록자는 사진이 1장만 올라가고, 유료 등록자는 사진을 11장까지 올릴 수 있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등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넝쿨의 광고료는 만 원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만 원이라는 금액을 저나 직원들이 정한 건 아니에요. 저희 마케터들이 사장님들을 만나면서 물어봤어요. 광고료가 얼마 정도면 부담이 없으시겠냐고. 그랬더니 만 원 정도면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만 원으로 하겠다고 했죠."

 

-타 업체에 비해 광고료가 한참 낮은데요.

"넝쿨의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좋기야 하죠. 하지만 단순히 돈을 위해서 수수료를 책정하거나 광고료를 올릴 생각은 없습니다. 우선 광고료를 받으면서 수수료까지 책정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창원 넝쿨 외에 타 지역으로도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던데요.

"김해, 진주 등 경남 지역에는 전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서비스하고 있고요."

 

-넝쿨의 수익은 어느 정도인가요?

"아직까지는 한참 적자입니다. 2013년 말에 창업했는데 첫 수익이 나온 게 지난해였어요. 그리고 그해 매출이 400만 원이고요. 직원이 8명인데 말입니다.(웃음)"

 

-앱을 보면 시즌2라고 나와 있는데, 시즌2는 뭔가요?

"시즌1이 수수료가 없는 배달이었다면 시즌2는 수수료가 없는 소셜커머스입니다. 지역의 이벤트나 할인정보 등을 기존의 서비스처럼 수수료 없이 제공하자는 게 목표입니다."


2015년 위미르 구성원들. /위미르


 

 

'청년 기업' 위미르

 

-위미르에 대해서도 질문 드릴게요. 직원이 몇 명이죠?

"마케터 3명에 개발자 2명, 디자이너 2명,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8명입니다."

 

-직원들 대부분이 창원 출신이라고요?

"예. 저는 경북 김천이고 개발자 한 명이 충청도 출신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창원 지역 사람들이고요. 충청도 출신의 개발자는 제가 삼고초려를 해서 데려온 인재입니다."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

"개발자는 어플리케이션 기능에 대한 개발을, 디자이너는 웹이나 어플리케이션 기능에 대한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케터들은 업체 사장님들을 만나 뵙고 불편사항을 접수하거나 SNS 마케팅을 하고요. 그러고 회계나 다른 자잘한 일은 제가 하고···. 사실 저는 딱히 하는 일이 없어요. (웃음)"

 

-대표님을 비롯해 직원분들 나이가 어린데요.

"전부 20대, 30대의 청년들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제가 77년생이죠. 대부분이 이 업종에서 경력이 없는 상태로 일을 시작한, 위미르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인재들입니다."

 

-지역에서 IT기업을 운영하는 건 어렵다고도 하는데요.

"초창기에 이걸로 말이 많았습니다. 소프트웨어는 지역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고, 지역에서 하면 망할 거라고. 하지만 저는 지역이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요. 저희 마케터들이 창원을 돌아다니면서 사장님들과 대화를 합니다. 그냥 영업이 아니라 상호간에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죠. 만약 처음부터 전국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했다면 지금만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지역에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다고 할 수도 없을 거 같아요. 서울에 인재들이 몰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서울에 일할 곳이 많고, 서울의 직장이 임금이 높거나 복지가 잘 되는 등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창원에도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많이 있고요. 하지만 인재들을 품을 기업이 없어요. 위미르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지만 당장 수용하긴 어렵거든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수도권으로 눈을 돌리는 거죠."



 

 

사람들과 상생하며 나아가는 게 목표

 

-예전에 네이버 같은 기업을 목표로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조금 다릅니다. 네이버 같은 대기업으로 만들고 싶다는 게 아니라 네이버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싶다는 거예요. 창원에 대해서는 네이버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싶다, 창원의 모든 정보를 넣자는 게 넝쿨의 처음 목표에요."

 

-앞으로 위미르를 어떻게 이끄실 생각이신가요?

"처음에는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하자, 좋은 회사를 차리자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많이 겸손해졌어요. 기존 사업들과 같이 성장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기존 사업들과 같이 성장한다는 것은?

"다른 분들과 상생하겠다는 거죠. 교차로나 벼룩시장, 상가모아, 줌마렐라 등. 기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과 협업해서 지역민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넝쿨에 등록하시는 사장님들은···. 이분들은 말할 것도 없어요. 일을 하다보면 눈앞에서 가게가 망해갑니다. 수익모델, 비즈니스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어요. 제가 이런 분들을 도와드리고, 또 이런 분들에게 도움을 받는. 그런 서비스를 꿈꿉니다."

 

-사업을 하면서 아쉬운 건 없으신가요?

"넝쿨과는 상관없는 얘기일 수 있는데요. 창원이나 경남도에서 지원하는 업종이 너무 편향되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창원은 제조업이나 특정 전문성 있는 업종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다른 업종에 대한 지원이나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령 IT 서비스 분야에서 창원은 매우 빈약한 수준입니다. 단순히 기업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서비스 기업이 없는 만큼 타 지역주민들은 누릴 수 있지만 창원 사람들은 못 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요. 더구나 창원에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의 기업이 없으니 지역의 인재들이 타 지역으로 많이 떠나고 있고요. 지역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업종의 다양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돈을 잘 벌고 도시가 좋아도 젊은 인재가 빠져나가는데 미래가 밝을 거 같지는 않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꼭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부탁합니다.

"위미르와 넝쿨은 지역의 청년들이 모여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지역 소프트웨어 서비스 시장을 성장시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할 계획입니다. 지역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다져나가면서 확장해 나가려고 합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 피플파워 2015년 9월호

Posted by 개척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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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서관, 마을방송을 넘어 NGO 도서관 설립 추진


올해로 21년째 활동하고 있는 경남정보사회연구소. 이름만 가지고는 이 기관이 어떤 조직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정보사회연구'라고 하니 온라인을 기반으로 네트워크 사회의 분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하기도 했다. 인터뷰에 앞서 사전조사를 위해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다. 웬걸, 경남정보사회연구소는 온라인·컴퓨터와는 관계되지 않았다. 지역의 마을도서관 운동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해오고 있는 조직이라는 것. 하지만 사전조사를 통해서 얻는 정보로도 한계가 있었다. 경남정보사회연구소를 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경남도서관 및 정보문화발전연구소

 

경남정보사회연구소(이하 연구소)는 1994년 6월 29일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며 첫 출발을 알렸다. 그리고 동년 10월 4일 '경남도서관 및 정보문화발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개소식을 가졌다. 이는 연구소가 지향하고 있던 '마을도서관과 평생교육을 통한 마을 공동체 운동'이 반영됐다고 한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연구소 활동에 참여한 다양한 이들의 생각이 맞물린 결과물이기도 하다.


연구소가 설립된 1994년의 창원은 지금처럼 잘 정돈된 도시가 아니었다. 지역 팽창으로 대부분의 거주자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주민들이나 새로이 자리 잡은 마을 주민들끼리 소통할 기회와 공간이 없었다. 연구소는 이런 사람들의 사회적 연대감을 향상시키는 사업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내세운 연구소의 목적은 '마을 공동체 회복과 새로운 건설'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것이다. 사업을 할 때나 사회적 여건, 제약에 따라 변경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추상적인 슬로건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정보문화 확산과 마을 도서관 사업', '사회교육과 평생학습공동체 형성 사업', '마을 동아리 활성화를 통한 축제와 취미활동 활성화 사업' 등이었다. 이런 목적과 활동들은 현 경남정보사회연구소의 모태가 됐다.


연구소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이재균 소장. /경남정보사회연구소


 

4년 차, 관록의 이재균 소장

 

사전조사를 마치고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연구소가 있는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 느긋하게 인근 주택가를 살피면서 연구소를 찾던 중 봉곡평생교육센터를 발견했다. 연구소 사무실은 봉곡평생교육센터의 2층에 있다고 사전에 연락을 받았었기에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바로 옆, 연구소 사무실이 보였다. '마을방송 창원TV'와 함께 사용하는 사무실. 곧장 안으로 들어가 인터뷰이 이재균(43) 소장과 인사를 나눴다.

 

우선은 연구소의 연혁이나 이 소장에 대한 개인 인적사항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마산이 고향입니다. 중·고등학교까지 마산에서 나왔고 대학은 창원대학교를 졸업했어요. 이후 직장생활도 계속 창원에서 해왔습니다. 지금은 통합 창원시가 됐으니 창원에서 쭉 지낸 셈이네요. 아, 지금 집은 김해 장유입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연구소에 몸담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간 그는 1997년에 제대했다. 당시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그는 막막함을 느끼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창원에서 연구소 활동을 하던 선배들에게 연락이 왔다.


"제 소식을 들었는지 선배들이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는데 의미 있고 좋을 것 같다. 관심 있으면 한번 해봐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학생운동도 하고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졌었거든요. 그걸 계기로 연구소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1997년에 입사한 이 소장은 연구원, 사무국장을 거치면서 2012년부터 소장직을 맡아 연구소를 이끌어가고 있다. 올해로 4년 차다. 각각의 마을도서관이 독립되어 운영되고 있지만 연구소에서 최고 책임자인 소장이라는 위치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현재 운영되는 3개 도서관의 센터장과 소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소가 진행하는 모든 사업의 총괄책임자니 말이다.


 

20년사, <창원이 그 처음이었다>

 

연구소는 지난 4월 23일, 2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창원이 그 처음이었다>를 출간했다. 연구소가 지나온 행적을 기록한 이 책에는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94년에 설립된 연구소가 올해로 2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해까지의 기록을 정리한 20년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고요. 책 제목은 책의 첫 부분에 있는 우무석 시인의 시 제목이기도 합니다. 연구소의 역사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연구소 구성원들의 생각 등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활동한 모습들도 기록했고요."


책은 약 287페이지의 분량으로 서(차례 序), 역사, 좌담회, 사람들, 자료, 마무리로 구성됐다. 연구소에 대한 논문이나 사업, 그리고 그 사업을 주도한 인물들의 설명까지. 연구소에 참여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책에 등장하는 면면들도 다양하다.


"연구소는 첫 출발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서 조직됐습니다. 조직 구성원들도 제각각이었죠. 도서관에 관심이 있던 문헌정보학과 교수님, 사회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던 사회학과 교수님, 교육에 관심이 있는 교수님이나 사회운동가, 변호사, 문학평론가 등. 정말 많은 사람이 연구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만큼 저마다의 시각에서 연구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워낙 다방면의 사람들이 참여했기에 연구소만의 정체성 유지에 어려움이 따르리라는 우려도 들었다. 과거에 비해 축소된 연구소 활동이 아쉽게 느껴졌다.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발전이 정체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자의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이재균 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20년이라는 기간 동안 연구소는 제 역할을 다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기록이나 성과에 의존하는 게 아닌, 지금의 연구소가 우리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만약 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살피고 고쳐나갈 생각입니다."

 

경남정보사회연구소에서 진행한 세계 책의 날 행사. /경남정보사회연구소



한 마을 한 책 읽기(One City One Book)

 

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 중 특히 눈에 띈 것은 '한 마을 한 책 읽기 운동'이다.


"한 마을 한 책 읽기 운동은 올해로 10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해외(미국)의 One City One Book 운동을 벤치마킹한 것이죠. 저희가 생각했을 때 창원지역은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으니, 시라는 넓은 범위보다는 마을에서 아기자기하게 모여 읽는 활동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책을 선정하고 읽는 운동을 떠올린 거죠."


한 마을 한 책 읽기 운동을 포함,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재균 소장.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의 활동에 대해 이 소장은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좋은 점은 이어가면서 부족한 것은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나갈수록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생기더군요. 한 마을 한 책 읽기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역 내 다른 단체들과 함께하는 행사로 기획했습니다. 단순한 독서운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공동체 운동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죠. 하지만 지금은 저희 연구소 중심의 독서 이벤트 행사처럼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소장의 말에서 한 마을 한 책 읽기 운동에 대해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연구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말하는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구소가 진행했던 마을도서관 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첫 모범사례가 됐습니다. 우리의 사례를 가지고 여타 시민단체에서 활용하기도 했죠. 나중에는 다른 시에서도 창원을 벤치마킹해 마을도서관 형성에 투자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발주자였던 다른 도시들이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구소의 힘, 노력만으로 해결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겠습니다"

 

연구소는 지금까지의 20년을 기록하기 위해 <창원이 그 처음이었다>를 발간하게 됐지만 이 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의 20년을 위해 과거를 밑거름 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준비한 게 연구소 장기발전계획인 마을방송이고요. 지난해 6월 마을방송을 개국할 때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들 해 주셨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마을방송을 기획한 것은 저희가 기존에 운영하고 있던 사업들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연구소에서 새로이 준비한 마을방송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 소장은 주민들이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마을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담아내고, 또 이를 TV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물론 아직 만족할 만큼은 아니다. 시간이 더 필요한 준비단계로 보이지만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는 게 고무적이다.


"마을방송 외에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NGO 도서관도 그중 하나인데요.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협력해서 NGO들을 위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계획입니다. NGO의 활동이나 역사를 체계적으로 관리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소 장기발전사업으로 구상해뒀지만, 마을방송이 채택되면서 잠시 보류 중입니다. 마을방송이 자리를 잡는다면 새롭게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된 연구소의 사업에도 불구하고 향상심을 잊지 않는 이 소장. 당장 현실이 어렵지만, 이런 어려움을 이겨낼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술자리에 있었던 일화를 말하면서, 정체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20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피력했다.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어떤 분이 제게 물어왔습니다. '만약 당신 자리에 장사꾼이 앉아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요. 그 말에 머릿속이 맑아졌습니다. 연구소를 비롯해 시민사회 운동들이 수년간 정체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저희는 시민들에게 '우리의 활동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느냐'고 말해왔죠. 하지만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장사꾼이라면 자기 상품이 안 팔린다고 불만을 가지거나 푸념하는 게 아니라, 상품을 팔기 위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노력하겠죠. 이 물건이 팔릴 물건인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요즘 트렌드는 무엇인지 등.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저희는 시민들이 참여할 수 없는 상품을 내놓고 '이거 참여하세요'라고 했던 건 아닌지 반성했습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주민들과 소통하는 연구소가 되고자 합니다. 이제 2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해야죠."


- 피플파워 2015년 7월호

Posted by 개척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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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하십니까? 저는 안녕해지고 싶습니다"

 

 

대학생. 참 묘한 신분이다. '학생'이다 보니 어리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이로는 어엿한 성인이다. 물론 월반이나 검정고시를 통해 미성년도 대학생이 될 수 있지만, 대부분 20살이 되면서 대학교에 입학하는 현실에서는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지금, 대학생 그리고 20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열심히 뛰고 있는 대학생을 찾아갔다.

 

 

인천에서 태어난 '진짜 경남 사람'

 

창원대학교 회계학과 4학년. 이것이 이현아 씨를 소개하는 신분이다. 그가 자취를 하고 있는 창원대 인근에서 만나기로 하고 찾아갔다. 채현국 어르신의 강연에서 스치듯 얼굴을 본 게 다였기에 혹시 놓칠세라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알아채지 못할까 봐 카메라까지 꺼내 들고 있었다. 다행히 서로를 알아채고 인사를 나눈 뒤 자리를 옮겼다.

 

깔끔하고 조용한 외곽의 카페로 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태어난 곳은 인천이에요. 하지만 워낙 유년 시절이었고, 경남지역에서 쭉 자라왔습니다. ··고 모두 김해, 창원에서 나왔어요. 대학교도 창원이니 '진짜 경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웃음)



창원대학교 이현아 학생


 

 

원치 않았던 학과, 진로의 고민

 

이현아(22) 씨는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동시에 복수전공으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있다. 4학년이 돼서야 선택한 복수전공이다. 4학년에 복수전공을 하는 것이 유별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흔치 않은 선택이기는 하다.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대학 원서를 쓰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학과를 다시 선택하고 싶거든요. 회계학은 제가 원해서 선택한 학과가 아니에요. 부모님의 권유로 회계학을 전공했죠. 여자가 회계학을 공부하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회계학과 가서 취업이나 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불가능하겠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사학과나 철학과를 가고 싶네요. 흥미가 있어서."

 

그는 부모님의 권유로 택한 회계학에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말이 '권유', 미성년인 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고 털어놓는 그였다. 때문일까. 국제관계학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국가 간의 관계를 비롯한 폭넓은 분야를 공부하는 응용학문인 국제관계학이 적성에 맞는 것일까.

 

"3학년까지 무척 조용한 대학생활을 했어요. 출석하고 시험 치고. 회계학을 공부하지만 '회계윤리'의 중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했죠. 자연히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거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택한 것이 국제관계학이죠. 주변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해요. '취업 걱정을 해야 할 시기에 왜 복수전공을 하느냐'는 내용이었죠.“



2014년 4월 28일에 진행한 '창원대, 가만히 있으라' 행사 /이시우 기자



 

안녕들 하느냐는 물음

 

'창원 안녕들하십니까'(안녕들)라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현아 씨는 대자보를 통해 사람들,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꿈꾼다. 갖가지 사회 문제에도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나 대학 내 문제를 다루는가 하면 노동자 편에 서서 그들과 소통하고 있다. 취업 걱정에 한창일 대학교 4학년, 무엇이 그를 밖으로 나오게 했을까 싶다.

 

"세월호 사건이 계기예요. 이전부터 많은 생각을 했지만 밖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제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외부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응어리진 제 마음을 대자보로 썼는데, 한 번 써보니까 할 만하더라고요. 이후로는 목소리를 내는데 맛을 들였다고 해야 하나?"

 

2013년 말부터 청년세대의 화제로 떠오른 '안녕들'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창원 안녕들'은 지역 현안과 적극적으로 결합해 단순히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성원도 제각각이다. 창원대 학생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른 대학의 학생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안녕들은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이라는 공간에서 모두가 소통하는 게 안녕들의 특징이에요. 학생회를 하던 친구가 대자보를 붙이는가 하면 저처럼 어쩌다가 참여하는 친구도 있고. 안녕들을 통해 제가 가지고 있던 고민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 제 고민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는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대학을 향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창원대, 가만히 있으라' 행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은 지역 내 대학생들과 청년단체 활동가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학생이 뭘 안다고 나서느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대학생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자는 생각에 이런저런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저희가 구체적인 연간계획을 짠다거나 하는 건 아니예요."(웃음)

 


2014년 9월 19일에 진행한 창원대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 행사 /김두천 기자



 

최악으로 치닫는 취업률

 

취업난, 청년실업의 문제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52월에 발표한 통계청의 고용동향에 따르면 15~29세 청년 실업률이 11%를 기록했다. 이는 IMF 이후 최악의 수치이며, 미디어나 주변에서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이제 익숙하다. 자연스레 대학생을 비롯한 20대 청년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취업'이 됐다.

 

"뭐 먹고 살지, 라는 고민이 저나 또래 사람들 사이의 가장 큰 고민인 것 같아요. 연애나 주거, 대학, 인간관계 등. 제각기 다양한 고민을 가지고 있겠지만, 취업만큼은 대부분이 공유하는 공통된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현아 씨 역시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뿌옇기만 한 취업이라는 허상과 팍팍한 현실이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마냥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다.

 

"최근 한 선배와 얘기를 나눴어요. 일찍 취업한 선배인데, 저를 만나고 싶다고. 제가 이렇게 방탕(?)하게 살고 있으니까 궁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배는 처음에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만족한다는 생각에 봉급을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했어요. 하지만 3개월 정도 다닌 지금에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자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을 가고 싶다고. 당장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취직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좋은 직장'이라는 말이 참 모호하거든요.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자리는 아닌 건 분명하죠. 지금은 같이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과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 사회에 건강한 힘을 줄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사회 운동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어요. 확정 짓지는 못했지만 제 일을 하면서도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자 하는 게 지금의 생각입니다."

 

 

"5·7포세대, 그런 건 누가 짓는 거죠?"

 

최근 청년 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가지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청년실업자와 신용불량자의 합성어인 '청년 실신'이나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낮은 급여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이케아 세대'. 그중에서도 '5포세대', '7포세대'라는 말은 유독 많이 알려졌다. 연애·결혼·출산·취업·주택을 포기한다는 5포세대, 이에 더해 인간관계·꿈까지 포기했다는 7포세대. 이에 이현아 씨는 쓴소리를 했다.

 

"일단 저는 처음 듣는 용어네요. 워낙 다양한 말들이 있다 보니.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청년들이 취업을 포기해요? 인간관계와 꿈마저 포기했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청년들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끊임없이 희망하지만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거죠. 포기라는 단어는 희망을 하지 않게 됐을 때 쓰이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바라고 희망하고 있어요. 20대들은 자기가 뭐라고 불리는지도 몰라요. 당장 눈앞의 일도 해결하기 힘든 걸요."

 

''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에서는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꿈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꿈이라는 녀석은 형이상학적인, 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꿈이 없다'고 하면 질책하는 사회다 보니 꿈에 대해 고민을 할 시간조차 없지 않은가.

 

"저에게 꿈이란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라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여태껏 제가 쌓아온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이를 토대로 설정하는 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런 의미에서 제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무척 암울하죠. 제가 쌓아온 게 없어서. 자꾸만 앞만 보고 꿈을 생각하다 보니 꿈이 참 멀게만 느껴지는데요.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창원대학교 이현아 학생.


 

 

"20,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20대이니만큼 들을 이야기도 많다. 그중 청년취업과 함께 최저임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자취를 하면서 월세나 기타 관리비, 통신비 등을 아르바이트 임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최저임금으로는 생활의 유지가 불가능해요.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하더라도 마이너스가 되거든요. 최저임금은 노동자가 최저한의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금액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마저도 지키지 않는 업소들도 수없이 많고."

 

간선제 형태로 이뤄지는 창원대학교 총장 선거에도 이현아 씨는 목소리를 냈었다. 총장 후보들에게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공개 질의서'를 제출하는 한편 소견발표회에 참석해 질문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후보들 모두 질의서에 답변하지 않았고 소견 발표회에서도 질문 시간이 따로 없었음을 토로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대학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아요. 학생들이 대학에 대해 회의적이게 됐어요. 대학에서 배운 것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이어가는 게 보통이니. 그나마 소통을 요구하더라도 응해주지 않고요. 인문·예술 대학 학과들의 폐과나 통폐합에 대해서도 아쉬워요. 취업률이 대학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아닐 텐데. 대학이 점점 기업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겠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그. 풀리지 않는 고민이지만 지금은 주변 사람들과 그 고민을 공유하며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로서 어른 세대에게 바라는 것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하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정답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그 세대가 아니기에 맞다, 아니다를 정의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방법적인 문제나 사고방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언이라면 좋은 양분이 되겠지만, 강요라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청년들, 열심히 살고 있어요."




- 피플파워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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